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 18

데살로니가전서,
세 번의 안식일로
시작된 교회

쫓기듯 떠난 바울이 걱정하며 써 보낸
신약에서 가장 이른 편지 가운데 하나

데살로니가전서 1–5장
여는 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기간은 사도행전에 "세 안식일"(행 17:2)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고는 소동이 일어나 밤중에 도망치듯 그 도시를 떠나야 했어요.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나온 부모 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 편지에는 걱정과 그리움, 그리고 "잘 버텨 주었구나" 하는 안도가 가득해요.

그 편지 속에 재밌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어요. 성경을 의심하던 학자들을 머쓱하게 만든 돌비석,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 교회, 유모이면서 아버지이면서 고아가 된 사도, 공동묘지라는 말의 뿌리, 2세기 파피루스에 남은 슬픈 위로 편지, 그리고 로마의 선전 구호까지요. 그 흔적을 따라가면 한 분이 보여요.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예수님이에요(1:10).

1부

데살로니가전서는 어떤 책일까?

갓 태어난 교회에 보낸 걱정과 소망의 편지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어요. 로마로 이어지는 큰길 "에그나티아 가도"가 지나가는 항구 도시라 사람과 물건과 소문이 모이는 곳이었죠.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나온 뒤 이 도시에 와서 복음을 전했어요(행 17:1-9; 살전 2:2).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성도들은 바울과 실라를 밤에 베뢰아로 보냈어요. 바울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이르렀고,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다녀와 좋은 소식을 전하자(3:6) 이 편지를 썼어요. 주후 50–51년 무렵으로 봐요.

도시의 이름주전 316년 무렵 마게도냐의 장군 카산드로스가 도시를 세우고, 아내의 이름을 붙였어요. 그 아내 데살로니게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였어요.
세 사람이 함께 보낸 편지"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1:1).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의 실라예요. 그래서 편지 곳곳에 "나"보다 "우리"가 훨씬 많이 나와요.

※ 데살로니가전서를 바울의 편지 가운데 가장 먼저 쓴 편지로 보는 학자가 많아요. 다만 갈라디아서를 더 이르게 보는 견해도 있어요.

데살로니가전서의 큰 특징 다섯 가지
1
가장 이른 편지 가운데 하나
신약 성경 스물일곱 권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책 가운데 하나로 꼽혀요. 복음서들보다도 먼저 쓰였어요.
2
장마다 재림으로 끝나요
1장 10절, 2장 19절, 3장 13절, 4장 16–17절, 5장 23절. 다섯 장이 모두 주님이 오시는 날을 바라보며 마무리돼요.
3
믿음·소망·사랑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1:3). 고린도전서 13장보다 몇 해 앞서 이 세 단어가 나란히 나와요.
4
부모 같은 목회자
유모처럼(2:7), 아버지처럼(2:11). 바울이 교회를 대하는 마음이 가장 따뜻하게 드러나는 편지예요.
5
짧고 굵은 명령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5:16-18). 성경에서 가장 짧은 명령들이 나란히 서 있어요.

데살로니가전서의 중심에는 이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1:9-10). 돌아서고, 섬기고, 기다리는 것. 이 세 동사가 이 교회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에는 이 약속이 있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4:17).

2부

더 깊이 숨은 7가지 장면

학자들을 머쓱하게 만든 돌비석부터 로마의 선전 구호까지

1

성경을 의심하던 학자들과
"읍장들"의 돌비석

사도행전 17:5-9

데살로니가에서 소동이 일어났을 때, 무리가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 간 곳은 "읍장들" 앞이었어요(행 17:6). 누가는 여기서 도시의 관리들을 폴리타르케스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단어는 옛 그리스 문학 작품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한때 일부 학자들은 "누가가 관직 이름을 잘못 썼다"며 사도행전의 정확성을 의심했어요.

그러다 데살로니가의 옛 성문 아치에 새겨진 비문이 알려졌어요. 거기에 바로 이 "폴리타르케스"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던 거예요. 이 비문은 19세기 후반 영국으로 옮겨져 지금 대영박물관에 있어요. 그 뒤로 마게도냐 지역에서 이 관직 이름이 나오는 비문이 여러 개 더 발견되었어요. 😄 성경을 고치려던 쪽이 오히려 고쳐진 셈이에요.

그 읍장들 앞에서 사람들이 한 고발도 재밌어요.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행 17:6),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17:7). 비난하려고 한 말인데, 사실은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은 말이었어요.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소식이 로마 황제의 도시를 흔들고 있었던 거예요.

※ 그 성문 비문은 바울 시대보다 조금 뒤인 주후 1–2세기의 것으로 봐요. 로마서 16:21의 "야손"이 데살로니가의 야손과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어요.

돌아보기
세상이 뭐라 하든,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을 오늘 내 삶에서 분명히 합니다.
2

마게도냐를 넘어
메아리처럼 울린 교회

데살로니가전서 1:6-10

데살로니가 교회는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교회였어요.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해요.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1:8).

여기서 "들리다"로 옮긴 말은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을 가리켜요. 영어 echo(메아리)와 뿌리가 같은 말이에요. 나팔 소리나 천둥소리가 골짜기를 따라 퍼져 나가는 모습이죠. 에그나티아 가도를 오가는 상인과 여행자들이 이 교회 이야기를 여기저기 퍼뜨렸을 거예요. 😄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 이야기 우리도 들었어요" 하는 바람에 바울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대요(1:8-9).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소문이 났을까요? 대단한 건물도, 많은 숫자도 아니었어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1:6),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었어요(1:9).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바뀐 삶 자체가 메아리가 되었던 거예요.

돌아보기
내 말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선 나의 삶이 주변에 복음의 메아리가 되기를 구합니다.
3

유모이자 아버지,
그리고 고아가 된 사도

데살로니가전서 2:7-17
2:7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VS
2:11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2장에서 바울은 자기를 세 가지 모습으로 그려요. 먼저 유모예요.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2:7). 여기서 유모는 남의 아이를 맡아 젖을 먹이는 사람이지만, "자기 자녀"라고 했으니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이에요. 다음은 아버지예요.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너희 각 사람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라"(2:11). 엄마처럼 품고, 아빠처럼 가르친 거예요.

재밌는 건 2장 7절의 옛 사본 이야기예요. 어떤 사본에는 "유순한 자"(에피오이)로, 어떤 사본에는 "어린아이"(네피오이)로 적혀 있어요. 헬라어로 글자 하나 차이예요. 😄 사도가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어린아이처럼 되었다"고 했는지,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다"고 했는지를 두고 지금도 학자들이 고민해요.

그리고 세 번째 모습이 나와요.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2:17). 이 "떠나다"는 고아가 되다라는 뜻의 말이에요. 쫓겨나 교회와 헤어진 바울은 자기가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느껴졌던 거예요. 엄마였고 아빠였던 사도가, 헤어지고 나니 고아가 된 거죠. 그만큼 이 교회를 사랑했어요.

※ 2:7의 두 가지 읽기 가운데 어느 것이 원래 글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뉘어요. 한글 개역개정은 "유순한 자"로 옮겼어요.

돌아보기
하나님께 받은 그 따뜻한 사랑으로, 내 곁의 믿음의 식구들을 엄마처럼 품고 아빠처럼 세워 줍니다.
4

"사탄이 막았도다"
그리고 "이제는 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2:18 – 3:10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고 싶었어요. "나 바울은 한번 두번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2:18). 이 "막다"는 길을 끊어서 못 지나가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바울처럼 믿음이 큰 사람도 길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는 게 오히려 위로가 돼요.

그래서 바울은 다른 길을 택해요.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3:1) 디모데를 보냈어요. 😄 "참다 못하여"가 두 번이나 나와요(3:1, 3:5). 걱정이 얼마나 컸는지 보이죠. 바울은 혼자 아덴에 남았어요. 우상이 가득한 그 도시에서 마음이 격분했던(행 17:16) 바로 그때였어요.

그리고 디모데가 돌아와 소식을 전해요. 교회가 믿음과 사랑 안에 굳게 서 있고, 바울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고요(3:6).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의 대답이 이거예요.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3:8). 교회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곧 바울이 살아갈 힘이었어요. 길은 사탄이 막았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지키고 계셨던 거예요.

돌아보기
내 계획이 막힐 때에도, 내가 갈 수 없는 곳을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5

"자는 자들"
공동묘지라는 이름의 비밀

데살로니가전서 4:13-18
2세기 파피루스 편지
"이런 일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서로 위로하십시오"
VS
데살로니가전서 4:18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슬픈 질문이 생겼어요. 주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죽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거였죠. 바울은 이렇게 답해요.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4:13).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잠"이라 불렀어요. 잠은 깨어나는 게 전제니까요. 그래서 초대교회는 성도들을 묻는 곳을 코이메테리온, 곧 "잠자는 곳"이라고 불렀어요. 이 말이 영어 cemetery(공동묘지)의 뿌리가 되었어요. 공동묘지라는 이름 안에 "다시 깨어날 사람들이 자는 곳"이라는 소망이 숨어 있는 거예요.

"소망 없는 다른 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 주는 유물도 있어요. 이집트 옥시링쿠스에서 발견된 2세기 파피루스 편지예요. 이레네라는 여인이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 보낸 위로 편지인데, 함께 울었다고 말한 뒤 이렇게 맺어요. 이런 일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서로 위로하라고요. 바울도 "서로 위로하라"고 말해요. 그런데 그 앞에 붙은 말이 전혀 달라요.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4:17-18).

※ 이레네의 편지는 바울 시대보다 한 세기쯤 뒤의 것이에요. 당시 이방 세계의 슬픔을 보여 주는 예로 학자들이 자주 인용해요.

돌아보기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릴 때, 다시 살리실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 있는 슬픔으로 웁니다.
6

주를 "맞으러" 나가는
도시의 환영 행렬

데살로니가전서 4:16-17 · 사도행전 28:15 · 마태복음 25:6

4장 17절은 이렇게 말해요.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여기서 "영접"으로 옮긴 말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익숙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어요. 황제나 장군 같은 귀한 분이 도시에 오면, 시민 대표들이 성 밖으로 나가 맞이한 뒤 함께 성 안으로 모시고 들어오는 환영 행렬이에요.

성경의 다른 곳에도 이 단어가 나와요.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갈 때, 로마의 형제들이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나왔어요(행 28:15). 그리고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에서도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마 25:6)고 외쳐요. 신랑을 맞으러 나간 사람들은 신랑과 함께 잔칫집으로 들어가요.

또 하나, "끌어 올려"라는 말은 라틴어 성경에서 "라피에무르"로 옮겨졌어요. 여기서 "휴거"를 가리키는 영어 rapture가 나왔어요. 하지만 바울이 강조하는 건 그 방식보다 결과예요. 먼저 잠든 성도와 살아 있는 성도가 함께, 오시는 왕을 맞으러 나가고, 그 뒤로는 "항상 주와 함께" 있는 거예요.

※ 4:17의 "영접"을 환영 행렬의 모습과 연결하는 것은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이에요. 주님을 맞은 뒤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적 견해가 다양해요.

돌아보기
오실 왕을 맞으러 나갈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을 연습합니다.
7

"평안하다, 안전하다"
로마의 구호 앞에서

데살로니가전서 5:1-11 · 5:27
로마가 약속한 것
"팍스 에트 세쿠리타스"
평화와 안전
VS
바울이 전한 것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멸망이 갑자기"(5:3)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온다고 말해요(5:2).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요.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5:3).

그런데 "평안과 안전"은 그 시대 로마가 즐겨 내세우던 말이었어요. 로마의 평화, 곧 팍스 로마나가 온 세상에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거였죠. 로마의 동전과 비문에도 "평화"와 "안전"이 새겨졌어요. 로마의 은혜를 입은 도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이 말은 아주 익숙하게 들렸을 거예요. 바울은 사람이 만든 평안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다른 갑옷을 입으라고 해요.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5:8). 1장 3절의 믿음, 사랑, 소망이 여기서 갑옷이 되어 다시 나와요. 그리고 편지를 맺으며 아주 엄하게 부탁해요.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5:27). 😄 편지 한 통 읽어 달라는 부탁에 이렇게 엄숙한 말을 붙인 건, 이 말씀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들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 5:3의 "평안하다, 안전하다"가 로마의 선전 구호를 겨냥한 말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뉘어요. 예레미야 6:14의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요.

돌아보기
세상이 약속하는 안전에 기대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갑옷을 입고 주님의 날을 기다립니다.
맺는 글
세 번의 안식일로 시작해
영원히 주와 함께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어요. 쫓겨나듯 떠났고, 다시 가려 해도 길이 막혔어요.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뿌려진 말씀이 온 마게도냐에 메아리처럼 퍼졌어요.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신 분이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에요.

이 편지는 장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을 바라보며 끝나요. 그 기다림은 불안한 기다림이 아니라 환영 행렬을 준비하는 기다림이에요. 먼저 잠든 사람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도, 모두 함께 오시는 왕을 맞으러 나갈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요.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4:17)

※ 본문 인용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